일반사건
[형사전문변호사] "칼을 들었어도 무죄?" - 정당행위의 모든 것
2026-09-21
"상대방이 먼저 달려들었는데, 저도 왜 처벌을 받아야 하죠?"
법률상담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다행히 우리 형법에는 이런 억울한 상황을 구제해 주는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형법 제20조가 정한 '정당행위'입니다.
최근 대법원이 흉기를 든 피고인에게 정당행위 성립 여지가 크다고 판단하며 원심을 파기한 사건[대법원 2026. 6. 25. 선고 2024도12616 판결]이 나오면서, 이 법리가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판결을 계기로 정당행위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1. 정당행위란 무엇인가 — 형법 제20조
(1) 우리 형법 제20조는, "법령에 의한 행위 또는 업무로 인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 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겉으로는 범죄처럼 보이는 행위라도 법질서 전체의 정신과 사회윤리·사회통념에 비추어 용인될 수 있다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정당방위(형법 제21조)나 긴급피난(형법 제22조) 같은 다른 규정과 달리, 정당행위는 일반적·포괄적인 위법성조각사유입니다. 다른 개별 규정에 딱 들어맞지 않는 애매한 상황에서도 "이건 사회 통념상 봐줄 수 있는 행동 아닌가?"를 마지막으로 물어볼 수 있는 안전망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2) 정당행위가 인정되기 위한 5가지 요건
대법원은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다음 5가지를 정당행위 판단 기준으로 제시해 왔습니다.
1. 목적의 정당성 — 행위의 동기나 목적이 법질서의 정신이나 사회윤리에 비추어 용인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분풀이·보복은 이 요건을 통과하기 어렵습니다.
2. 수단의 상당성 — 목적이 정당해도,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사용한 방법이 적합하고 필요한 범위 내에 있어야 합니다.
3. 법익균형성 — 지키려는 이익이 침해되는 이익보다 크거나 최소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4. 긴급성 — 그 행위를 해야 할 급박한 사정이 있어야 합니다.
5. 보충성 — 그 행위 외에 다른 적법한 수단이 없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다섯 가지가 각각 따로 심사하는 항목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를 이루는 불가분의 요소들로서 종합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2. 2023년 대법원 판결이 바꾼 것 — 긴급성·보충성의 재해석
대법원은 2023년 2017도2760 판결(업무방해 사건)을 통해 정당행위 법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과거에는 "다른 법적 수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 예컨대 민사소송을 낼 수 있었다면, 경찰에 신고할 수 있었다면 — 정당행위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23년 대법원 판결은 이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정리했습니다.
"긴급성과 보충성은 수단의 상당성을 판단할 때 고려요소의 하나로 참작하여야 하고, 이를 넘어 독립적인 요건으로 요구할 것은 아니다. 또한 그 내용 역시 다른 실효성 있는 적법한 수단이 없는 경우를 의미하고 '일체의 법률적인 적법한 수단이 존재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풀어 말하면, 법원은 이제 "형식적으로 다른 수단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이 실제로 택할 수 있었던 실효성 있는 다른 수단이 있었는가"를 묻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법적 수단을 이유로 정당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제도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최근 선고된 대법원 2024도12616 판결 — "흉기를 들었어도 전체 상황을 봐야 한다"
최근 2026. 6. 25. 선고된 대법원 2024도12616 판결은 이 법리가 실제 사건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잘 보여줍니다.
(1)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여성인 피고인(39세)은 어린 시절 76세 친척(피해자)이 자신을 성추행 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렸습니다. 이에 격분한 피해자가 예고 없이 피고인의 집을 찾아가 기다리다가, 피고인이 퇴근해 현관문을 열자마자 얼굴을 주먹으로 구타했습니다. 몸싸움이 벌어졌고, 동거하던 이모의 개입으로 잠시 떨어졌지만, 피해자는 곧바로 무거운 서랍을 피고인에게 던져 손가락에 상해를 입히고, 다시 얼굴을 가격한 뒤 가위를 집어 들고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너 죽고 나 죽으면 된다"며 위협했습니다. 이에 피고인은 싱크대 위의 부엌칼(칼날길이 25cm)을 들고 "변태 새끼야 죽고 싶으면 너나 죽어, 죽고 싶으면 와 봐라"라고 말하며 대치했고, 스스로 112에 신고해 경찰을 불렀습니다.
(2) 1심과 항소심은 피고인의 정당방위와 정당행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종합적으로 짚었습니다.
• 다툼의 발단과 경위에 비추어 책임이 근원적으로 피해자 쪽에 있고, 피해자의 폭행·위협이 피고인의 대응보다 훨씬 무겁다는 점
• 감정적으로 격앙되고 두려운 상태에서, 흉기(가위)를 든 채 생명을 위협하는 피해자의 추가 공격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행위라는 점
• 피고인이 칼을 든 이후 추가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112 신고를 해 경찰의 도움을 요청했으며, 경찰이 올 때까지 칼을 든 채 부엌에 머물렀을 뿐 더 이상의 위협은 하지 않았다는 점
대법원은 "피고인이 부엌칼을 든 행위 자체는 위험성에 비추어 부정적 평가가 가능하지만, 정당행위 해당 여부는 그 행위에 이르게 된 일련의 구체적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못 박으며,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3) 이 판결이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흉기를 들었으니 무조건 유죄"라는 식의 단편적 판단을 경계하고, 행위에 이른 경위와 사후 행동까지 포함한 전체 맥락을 보아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참고> 정당행위와 정당방위, 무엇이 다른가
두 개념은 자주 혼동되는데, 간단히 구분하면 이렇습니다.
• 정당방위(형법 제21조): 현재 나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부당한 침해'가 진행 중이거나 임박한 상황에서, 이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로, 그 요건이 비교적 구체적입니다.
• 정당행위(형법 제20조): 정당방위 등 개별 조각사유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사회통념상 용인될 수 있는 행위"라면 처벌을 면하게 해주는 보충적·일반적 조각사유입니다.
실무에서는 두 주장이 함께 제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위 2024도12616 사건에서도 피고인 측은 정당방위와 정당행위를 함께 주장했습니다.
4. 일반인이 꼭 기억해야 할 세 가지
(1) "먼저 공격당했다"는 사실만으로 자동으로 정당행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은 항상 "그 방법이 상당했는가",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를 함께 따집니다. 감정이 격해지더라도 대응의 정도를 최소한으로 유지한 쪽이 법적으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섭니다.
(2) 사건 이후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위 2024도12616 대법원 판결에서 대법원이 특히 주목한 것 중 하나가 피고인이 스스로 112에 신고했다는 사실입니다. 위협적인 상황이 끝난 뒤 추가 공격을 하지 않고 수사기관의 개입을 요청한 행동은 정당행위 인정에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3) "법적 수단이 전혀 없어야만" 정당행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2023년 대법원 판결 이후로는, 형식적으로 민사소송 등이 가능했다는 사정만으로 정당행위를 쉽게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판단은 사건마다 구체적 사실관계에 크게 좌우되므로, 비슷한 상황에 처하셨다면 반드시 변호사와 구체적인 사정을 상담해 보시길 권합니다.
5. 마무리 — 억울한 일을 당하셨다면
형법 제20조 정당행위는, 법이 모든 상황을 미리 예측해 규정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만들어진 조항입니다.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행위"라는 다소 추상적인 기준이지만, 법원은 수십 년에 걸쳐 5가지 요건이라는 구체적인 판단 틀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번 대법원 2024도12616 판결은, 방어 과정에서 한 행동을 평가할 때 그 순간의 행위만 단편적으로 떼어보지 말고 전체 상황의 경위와 흐름, 그리고 사후 대응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확인해 주었습니다.
억울하게 피고인이 되셨거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대응하셨던 분이라면 이 법리를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사건의 경위와 전후 맥락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시고, 정당행위 해당 여부를 변호사와 함께 검토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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