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자본시장
[『Too Big To Fail』과 함께하는 금융법 산책(10)]
2026-09-08
서론 : JP모건이 되고자 했던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이 결단을 내린 것은 이때였다. 1907년 금융위기에서 미국을 구하는데 일조했던 JP모건 앤드 컴퍼니의 시조 존 피어몬트 모건과 같은 역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
이제부터 우리는 서서히 리먼브라더스는 붕괴과정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붕괴에 앞서 미국 정부는 일단 리먼브라서스의 붕괴를 멈춰보기 위해 월스트리스에서 영향력 있는 Commercial Bank 및 Investment Bank의 수장들을 모두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그들에게 리먼브라더스를 살릴 자금을 내놓으라는 무형의 압박을 가하였습니다.
그 때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이 금융위기 상황속에서 과거 1907년 금융위기를 구한 JP모건과 같은 리더쉽을 발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이번 블로그에서는 1907년 미국 금융위기라는 초유의 사태가 어떻게 빗어졌고, 그것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이후 이 사건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탄생시키게 했던 배경이 되었던 이유를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유가 불러온 파국, 1907년 금융위기
20세기 초 미국 금융 시스템은 중앙은행이라는 제도적 안전장치가 부재한, 사실상 ‘무정부적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즉, 중앙은행없이 각 지방에서 자생한 은행들이 난립해 있었던 것입니다. 중앙은행이 없으니 현재 지금 보는 것과 같은 <달러>라는 전국적 단위의 통일된 화폐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 전역에는 각 지방은행들이 각자 발행한 화폐만 해도 수백가지가 되었습니다.
한편, 당시의 금융 생태계는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급격히 팽창한 <신탁회사>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는 시스템적 리스크를 임계점까지 끌어올리는 전략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신탁회사>가 무엇일까요? 지금의 금융법에서 말하는 <신탁> 개념으로 접근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은행 외에 믿고 돈을 맡긴 회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반인들로부터 돈을 수탁받은 신탁회사는 그야말로 그 돈을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심지어 주가조작을 해서라도) 불려서 돈을 맡긴 사람에게 이익을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결함은 결국 현대적 의미의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이 가진 태생적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대폭발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 그림자금융의 의미에 대해서는 <『Too Big To Fail』과 함께하는 금융법 산책(6)>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당시 시스템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자산과 부채의 구조적 격차에 있었습니다. 엄격한 규제를 받던 일반 상업은행은 25%의 지급준비율을 유지했으나, 신탁회사들은 고작 5% 내외의 지급준비율만으로 고위험 투자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산-부채 만기 불일치(Asset-Liability Mismatch)>는 유동성 공급이 중단될 경우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휘발성 강한 구조를 형성했습니다.
위기의 도화선은 1907년 10월, 뉴욕 제3위의 신탁회사인 니커보커 트러스트(Knickerbocker Trust)에서 당겨졌습니다.
사장 찰스 바니가 '유나이티드 카퍼(United Copper)' 주식 투기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포에 질린 예금주들이 본점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단 몇 시간 만에 800만 달러의 현금이 바닥났고, 결국 지급 정지라는 파국에 이르렀습니다. 이 독성 강한 공포는 즉각 전염되었습니다. 긴급 유동성 공급이 거부되자 위기는 'Trust Company of America' 등 우량 기관으로 번졌고, 뉴욕 금융권 전체의 자금 흐름은 동결되었습니다. 민간의 탐욕과 시스템의 부재가 결합하여 발생한 이 거대한 불길을 진화한 것은 국가가 아닌, 역설적이게도 한 개인의 결단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 J.P. 모건과 민간 차원의 위기 해결
국가 경제의 명운이 공적 기구가 아닌 특정 민간 금융가의 역량과 의지에 의존해야 했던 사실은 당시 시스템의 한계와 시대적 역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위기가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자, 금융 제국을 건설한 존 피어몬트 모건(J.P. Morgan)이 직접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는 뉴욕의 주요 은행가들을 자신의 개인 서재인 '모건 라이브러리'로 소환한 뒤, 서재 문을 걸어 잠그고 "합의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문을 나갈 수 없다"며 강력한 심리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 긴박한 대치는 새벽 4시까지 이어졌고, 결국 은행가들로부터 유동성 출자 합의를 끌어내며 시장에 숨통을 틔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건이 수행한 역할은 현대 중앙은행의 정수인 <최종 대출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맹목적인 자금 살포 대신, 철저한 '자산 검사(Solvency Assessment)'를 통해 상환 능력이 있는 건전한 기관만을 선별하여 자금을 주입하는 정교한 리스크 관리 체계를 가동했습니다.
이는 민간 차원에서 구현된 가장 효율적인 위기관리 메커니즘이었으나, 동시에 국가의 명운을 개인의 선의에 맡겨야 한다는 근본적인 공포를 사회에 각인시켰습니다.
결국 한 개인의 위기관리 능력에 의존하는 구조가 지닌 취약성은 제도적 장치(Fed) 탄생의 필연성을 강화했습니다. 개인의 구원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미국은 이제 더 거대하고 항구적인 공적 '시스템'을 설계하기 위한 역사적 행보를 시작하게 됩니다.
연방준비제도의 탄생과 시련 : 설계된 독립성과 치명적 오판
1913년 설립된 연방준비제도(Fed)는 단순한 기구 창설을 넘어, 미국 내 뿌리 깊은 정치적·지역적 갈등의 산물이었습니다.
1910년 <지킬 섬(Jekyll Island)의 비밀 회동>에서 싹튼 <올드리치 플랜>은 워싱턴의 중앙 이사회와 전국 12개 지역 연준으로 권한을 분산하는 독특한 구조를 채택함으로써, 중앙집권적 권력에 대한 미국인들의 전통적인 불신을 잠재우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우리는 각 국가가 금융제도를 총괄관리할 중앙은행이라는 제도를 그야말로 공기와 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1913년에서야 비로소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전세계 금융을 주무르고 있는 월스트리트를 보유한 미국에서 중앙은행이 만들어진지 불과 100년 남짓 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나요?
미국에서 이렇게 늦게 중앙은행이 만들어진 것은 미국만의 독특한 지방중심 문화, 그리고 상공업자와 농민들의 뿌리깊은 갈등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미국 중앙은행의 탄생과 관련한 뒷 배경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부된 권력: 미국이 연준을 불신해온 역사적·철학적 이유
중앙은행에 대한 반감은 단순한 경제적 불만을 넘어, 미국의 건국 정신과 민주주의 가치에 맞닿아 있는 철학적 대립이었습니다.
이는 강력한 산업 국가를 주장한 <해밀턴>과 지방 분권과 농업을 강조한 <제퍼슨>의 대립에서 시작되어, <앤드루 잭슨>의 <은행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미국이 1783년 독립전쟁에서 영국에 승리한 뒤, 미국의 미래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강력한 산업국가의 정체성을 주장한 <헤밀턴주의자>들은 미국이 농업이 아니라 상공업에 국가의 역량을 집중시켜 상공업 선진국이었던 영국을 앞서 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대비해 <제퍼슨주의자>들은 미국은 상공업 선진국이었던 영국과 경쟁을 해서는 안되고, 영국에 <비교우위>가 있는 농업에 국가의 역량을 주입하여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해밀턴은 독립국가가 된 미국을 상공업 중심국가로 키우기 위해 화폐 유동성 공급을 조절하는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할 제1미국은행(1791년 ~ 1811년)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위 은행은 20년 동안만 유지될 수 있는 면허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20년 후에는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816년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제2미국은행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앤드류 잭슨은 위 중앙은행을 “특권층의 카르텔"로 규정하며 이를 해체하는 데 정치적 명운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불신은 실제적인 경제적 소외와 압착의 역사에서 기인합니다. 1837년 미국에는 공황이 발생하면서 각 영역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디폴트가 무차별로 발생하게 되면, 중앙은행이 긴급하게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서 시장의 발작을 잠재우려고 하는데, 당시 중앙은행은 이러한 시장관여에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중앙은행 역시 디폴트 상황에서 자신의 자산을 보존하기 위해 그 스스로 채권 회수에 나서는 긴축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급격한 긴축은 원자재 가격 폭락으로 이어졌고, 미국의 농민들은 대거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지며 자산을 압류당했습니다.
※ 급격히 긴축을 하면, 채무 변제를 위해 채무자는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팔아야 하는데, 긴축 시점에서는 시장에 유동성이 무족하여 자산의 매수할 자금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빚을 갚기 위해서 채무자는 울며겨자 먹기로 자신의 자산을 <할인 판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긴축 시 원자재 가격이 폭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당시 농사를 짓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낼 수 밖에 없었던 채무자 농민들에게 중앙은행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동부 엘리트들의 배만 불리는 약탈적 기구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관점에서 중앙은행은 농민들의 눈총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앙은행은 당시 지방은행들에게 유동성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당시 상공업이 발달했던 동부 지역의 지방은행은 상공업에 대한 투자 수요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이 동부 지역의 지방은행에 몰리는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또한 동부지역이 자금의 수요가 많기도 했지만, 상공업 투자의 부도율이 농업 투자의 부도율보다 낮았기 때문에 상공업자에 대한 금리보다 농업자에 대한 금리가 더 높았습니다
결국, 자금을 공급과 금리라는 측면에서 농민들은 동부지역의 상공업자들에 대해서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결론
결국, 1907년의 미국 금융위기는 민간적 차원에서 위기 극복의 실마리가 풀렸지만, 궁극적으로는 중앙은행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로 작동하였습니다.
1913년 만들어진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그 이후 미국의 금융위기적 상황이 닥치면 즉시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시장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동성 공급자 역할수행은 부정적인 효과도 낳았습니다. 즉, 시장에 문제를 야기시킨 주체들이 그 책임을 지지 않고, 중앙은행의 도움을 받아 회생하는 그야말로 <Moral Hazzard>가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리먼브라더스의 부도 위기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월스트리트의 주요 CB와 IB를 불러모아 문제를 야기한 민간 금융섹터들이 스스로 돈을 내어서 위기를 극복해라고 압박을 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민간 금융섹터들의 갹출이 효과를 빗었는지는 차차 살펴봐야 겠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아래 블로그 링크를 통해 확인 부탁드립니다.
